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압뒬하미트 2세 (문단 편집) ==== [[크레타]] 상실과 함께 시작된 독재 ==== 결국 미드하트 파샤가 주도한 입헌혁명 체제는 1년만인 1877년에 '''러시아와의 전쟁을 이유로''' 폐지되었고, 압뒬하미트 2세는 전제군주제를 부활시켰다. 하지만 전제군주제 체제로 복귀한 이후에도 압뒬하미트 2세의 정책은 여전히 자유주의적이었다. [[탄지마트]] 이후 발달하기 시작한 자유언론은 미드하트 헌법의 폐지 이후에도 유지되었으며, 정권에 대한 비판도 자유롭게 허용되었다. 하지만 그의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은 1897년 그리스-오스만 전쟁으로 인해 바뀌게 되었다. [[그리스]] 본토는 1833년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지만 북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서트라키아 지방) [[크레타]]를 비롯한 [[에게해]] 도서지방은 압뒬하미트 2세 시기까지만 해도 오스만 제국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1895년 크레타의 그리스인들이 반 오스만 봉기를 일으키자, 그리스는 이들을 지원했고 결국 오스만 제국과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 자체는 그리스가 패배했으나, 오스만 제국은 서구열강의 개입으로 크레타를 '크레타 자치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시켜야 했다. 문제는 이 전쟁의 원인은 그리스였고[* 그리스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닌데 애초에 오스만이 먼저 크레타의 자치를 규정한 할레파 협약을 파기해서 분노한 크레타의 그리스인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보상금도 지불했지만 정작 전쟁에서 이긴 오스만 제국이 자국의 속령인 크레타를 떼어줘야 하는 상황에 튀르크인들이 매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독립한 크레타 자치국은 명목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지만, 국가원수가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의 차남 요르요스 왕자이고, 총리는 에노시스 운동의 거두인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였으니 사실상 크레타는 그리스의 영토가 된 셈이었다. 오스만 제국 언론들은 연신 황제의 졸속외교를 비난했으며, 코스탄티니예에서는 시위가 이어졌다. 압뒬하미트 2세의 재위기간동안 상실한 영토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 [[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중재에 대한 대가로 [[영국]]에 [[키프로스]]를 할양. * [[1878년]] [[베를린 회의]]에 따라 [[러시아 제국]]에 [[바투미|바툼]], [[아르다한]], 카르스(Kars), 올투(Oltu), 카으즈만(Kağızman)을 러시아에게, 코투르(Kotur)와 근교는 [[페르시아]]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할양.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세르비아]] 역시 독립을 인정하고 일부 영토를 할양. [[불가리아]]는 자치국화 되었으나 이후 독립함. 또한 불가리아 남부 지역에 동루멜리아 주(Şarkî Rumeli Eyaleti)가 성립되었으나 이 지역은 훗날 불가리아에 합병됨. * [[1881년]], [[그리스 왕국]]의 요구 및 열강의 압력으로 싸우지 않고 엘라소나(Ελασσόνα/Alasonya)를 제외한 테살리아(Θεσσαλία/Teselya) 전체와 아르타(Άρτα/Narda, 현재의 이피로스 지방에 위치한 옛 지명, 근처에 [[프레베자 해전]]으로 유명한 프레베자가 위치해 있다.)을 그리스에게 넘김.[* 1897년 크레타 전쟁 당시 테살리아를 일시적으로 점령했으나 열강의 압력으로 도로 뱉어내야 했다.] * [[1881년]] [[프랑스 제3공화국]], [[튀니지]]를 보호국화. * [[1882년]] [[영국]], [[이집트]]를 보호국화. * [[1897년]] [[크레타]] 전쟁의 결과 크레타 자치국이 세워지면서 사실상 독립. [[발칸 전쟁]] 시기 [[그리스 왕국]]으로 합병됨. 압뒬하미트 2세의 재위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은 약 160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를 상실했으며, 특히 유럽 내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은 후대의 메흐메트 5세 시기에 독립하게 될 [[알바니아]]와 나중에 [[발칸 전쟁]]으로 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가 갈라먹을 영토, 오늘날에도 튀르키예령으로 남은 동트라키아 일대를 제외하면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모든 세력이 크레타 상실 이후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민족주의자들은 독립국가를 주장했고, 제국에 충성하는 신민들조차도 열강에 좌지우지되는 현실을 비난했다. 개혁성향의 학생운동으로 시작된 [[청년 튀르크당]](Jön Türkler)의 전신인 통일과 진보 위원회(İttihat ve Terakki Cemiyeti)도 1889년 비밀결사로 수립되어 활동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